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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농은선생신도비명(農隱先生神道碑銘)
農隱先生神道碑銘 蓋當麗氏之末上下無政彝倫斁塞時則有若農隱趙公與圃冶諸賢並志同揆嚴華夷之別尊紫陽之學撥亂反正事功偉然而文獻斷續有難折衷後孫等爲是之懼問及於不佞余謂只因其家傳舊錄而隨所見聞補其不足者庶幾寡過矣乎謹按公諱元吉字聖仲一云太初系出玉川即今淳昌郡曾祖檢校大將軍諱璋祖奉翊大夫版圖判書諱洪珪考生員文科以公推恩封玉川府院君諱佺妣馬韓國夫人潭陽田氏以 忠穆王乙酉登文科當是時大明御字元主北遁朝論携貳嚮背靡定公謂君臣大義天理民彝之不可易者今建大義事天下之共主使吾邦掃除胡塵之汚染得見日月之光所不容己也彼李仁任池奫輩之變於夷而得罪名義者何足道也且謂欲求孔孟之道當自朱子書始夜思晝誦殆若芻豢之悦口盖其不拘於流俗儼立守正有如此甲寅進封事槩言淫祀無福請毀塔廟建學宮又置學田如崇安縣取五浮屠之田而歸之學之例以爲養士之資次言近於民而承流宣化者守令爲然今貧墨成風民不聊生宜於百僚中擇其廉平公直者衣繡持斧黜幽陟明又以豊儲積備凶荒詰戎兵禦外侮等事反復敷衍首尾屢百言言甚切至而不報己巳同鄭圃隱偰芸亭長壽成獨谷石璘諸公定議策立恭讓王錄一等推忠奮義翼戴弼成克復功臣三重壁上大匡輔國光祿大夫檢校門下侍中典工判書玉川府院君時我 康獻大王威德日盛天人屬意公即浩然歛退卜居郡東金掘里因號農隱杜門自靖誦伯夷之傅歌淵明之辭俯仰慷慨若將終身其寄圃隱詩曰病耳不堪聞世事滿川明月一簑衣牧隱贈詩亦有杵臼肯移存趙志華封空抱祝堯情之句蓋其托意榛苓至死不變之操尤不可誣也庚午八月考終于寝翌年正月禮葬柳等面乾谷村子坐之原 贈諡忠獻 正宗庚戌因士林疏請配享于淳昌武夷院配郡夫人靈光金氏典翰時女墓祔一男瑛書雲觀副正 太宗朝徵以吏曹判書世子師傅不就繼配復興趙氏墓祔育一男瑜進士文科典農寺副正時喪紀廢弛類百日即吉乃三年廬墓除檢校漢城判尹不就 世宗朝旌閭曰孝子前副正盖並褒其忠也繼配扶餘金氏育三男瑾武科縣監琰節制都尉兼咸城萬戶璛失官階瑛二男龜山生員司正斐生員女適贊成南楫縣監薛寅瑜二男斯文左軍司正 贈吏曹叅議崇文武科兵使丙子殉節於六臣之禍諡節愍享莊陵別壇瑾男介甫生員郡守女適敎授曹致善琰男淵 贈參判龜山男士敦文科正言士淳文郡守女適景居倫斐男頤履生員思履生員明履文科正言恒履女適宋碩之朴思寅金石達斯文男智山武科僉樞智崑縣監智崙察訪智崗司果 贈參判崇文男哲山遵父敎同殉節 贈敎官亦享莊陵別壇介甫男孟謙仲謙並參奉仁謙同中樞季謙司直女適奇信中徐思勉淵男方以孝旌閭餘不盡述噫今距公殆五百有餘歲矣微言邃行雖不可詳若其高節大義之庶乎三仁而無愧爲圃冶同歸者先輩之尚論己定一臠可以知全鼎又何必多乎哉丐銘者壽民昇鉉秉憲泳萬皆吉士也銘曰麗季節義盖多可述尊中華統信紫陽學風氣所牽而難其得公姿超群彷彿閫域誰其資益圃冶同德發爲事業協贊王室晩節歛退義在 罔僕有此貞石過者其式 月城 崔益鉉 撰 參判勉菴 농은선생신도비명(農隱先生神道碑銘) 高麗 말기를 당하여 위 아래로 정사가 어지러워 인륜이 어그러졌는데, 이때 농은 조공이 圃隱 ①鄭夢周선생 ②吉再선생 같은 제현과 함께 뜻을 같이하여 華夷의 구별을 엄격하게 하고, 朱子의 학문을 존숭하여 어지러움을 떨치고 反正한 공훈이 우뚝하다. 그러나 문헌이 이어지지 못하여, 절충하기가 어려워 후손들이 이를 걱정한 나머지 나에게 울어왔다. 그래서 나는 말하기를, 「다만 그 家傳과 舊錄에 따라서 보고 들은 바로 부족한 것만 보충하면 거의 잘못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데, 공의 諱는 元吉이요, 字는 聖仲 혹은 太初이니 옥천이 관향인데, 옥천은 바로 지금의 순창이다. 증조는 검교대장군 휘 璋이며, 祖는 奉翊大夫 版圖判書 휘 洪珪이며, 고는 生員文科 로 옥천부원군에 봉해진 휘 佺이며, 妣는 馬韓國夫人 潭陽田氏이다. 공은 忠穆王 을유년(一三四五)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明나라가 들어서 元나라 임금이 북쪽으로 도망하였다. 그래서 조정의 의논이 둘로 나뉘어 向背가 정해지지 않았다. 공은 이르기를, 「군신 사이의 큰 의리와 天理, 人倫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대의를 세워 천하가 함께 섬기는 임금을 섬겨 우리나라로 하여금 지금까지 오랑캐에게 물든 것을 소제하고 해와 달의 광명을 보아야지, 저 ③李仁任, ④池奫이 오랑캐로 변하여 대의를 저버린 것을 말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孔子·孟子의 도를 얻으려거든 우선 朱子의 글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하고는 주야로 암송하고 외는 것이 마치 맛있는 음식을 대하듯 하였으니, 공이 世俗에 흐르지 않고 우뚝하게 正道를 지키는 것이 이와 같았다. 갑인년(一三七四)에 上疏하였는데 그 대강은, 「淫祀(지내지 않아도 되는 신에게 지내는 제사)는 아무런 福도 주지 않으니 塔廟들 을 헐고 學宮 세우기를 청합니다. 또 學田을 설치하되, 崇安縣처럼 하고, 다섯 절간의 밭을 빼앗아 학전을 삼아 선비기리는 미천을 삼아야 합니다.」 하곤 또 이르기를, 「백성들 가까이서 임금의 덕을 펴는 자는 수령입니다. 지금은 탐욕스러움이 풍속을 이루어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백관 가운데서 청렴 공평한 사람 을 가려 御史로 삼아 어두운 자는 내쫓고, 밝은 자는 높이어야 합니다. 또 풍년에는 흉년을 대비하여 곡식을 저축하며, 군사를 양성하여 外侵에 대비하여야 합니다.」 하는 등의 일을 반복하여 수백마디를 부연해 그 말이 매우 간절하였는데도, 아무런 비답(批答)이 없었다. 기사년(一三八九)에는 圃隱鄭夢周芸亭, ⑤偰長壽, 獨谷, ⑥成石璘 제공과 함께 의논을 정하여 恭讓王을 책립하여 一등공신에 서훈되어 추충분의익대필성극복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보국광록대부검교문하시중전공판서 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때 우리 太祖(李成桂를 말함)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높아져 백성들의 마음을 샀는데, 이를 본 공은 호연하게 물러나 순창군의 동쪽 金掘里에 은퇴하여 호를 농은이라 짓고는 문을 닫고, 절개를 지키며 ⑦伯夷傳을 외고 ⑧陶淵明의 歸去來辭를 읊었는데, 그 비분강개함이 마치 죽으려는 것 같았다. 공이 포은에게 준 시에, 위 어두운 듯 세상 일 듣지 않고 病耳不堪聞世事 달 밝은 시냇가에 도롱이 걸친 사람이네. 滿川明月一簑衣 하였고 牧隱이 공에게 준 시에, 귀 어두운 듯 세상 일 듣지않고 病耳不堪聞世事 달 밝은 시냇가에 도롱이 걸친 사람이네. 滿川明月一簑衣 하였고, 牧隱이 공에게 준 시에, ⑨저구는 기꺼이 조나라 보존할 마음 두고 杵臼肯移存趙志 ⑩화봉의 백성은 공연히 요임금을 축수하네. 華封空抱祝堯情 하는 구절이 있었으니 이는 그의 뜻을 榛苓에 부쳐 죽도록 지조를 변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경오년(一三九○) 八월, 正寝에서 考終命하여 다음 해 一월에 柳等面 乾谷村 子坐 언덕에 장사하니, 충헌이란 시호를 내렸다. 正祖 경술년(一七九○)에 士林의 상소에 의하여 순창 武夷院에 配享하였다. 配 郡夫人 靈光金氏는 典翰 時의 따님인데 묘소는 부장이다. 장남 瑛은 書雲觀副正으로 태종때 이조판서 世子師傅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繼配 復興趙氏 역시 부묘인데, 一남을 길렀으니 瑜이다. 유는 진사문과하여, 典農寺副正을 지냈다. 그때에 喪禮가 문란해서 모두가 一백일이면 복을 벗었으나, 그는 三년동안 侍墓하였으며, 태종조(太宗朝)에서 檢校漢城判尹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세종때 孝子前副正이라 旌閭를 내렸으니, 이는 그의 忠을 아울러 표창한 것이다. 繼配 扶餘金氏는 三男을 길렀는데, 瑾은 武科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고, 琰은 節制 都尉兼咸城萬戶를 지냈으며, 璛은 관직을 모른다. 瑛은 二남인데, 龜山은 생원으로 司正을 지냈고, 斐는 생원이며 딸은 贊成 南楫과 현감 薛寅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瑜는 二남을 두었는데, 斯文은 左軍司正으로 吏曹叅議에 추증되고, 崇文은 무과에 급제하여 兵使를 지내다. 병자년(一四五六) 死六臣의 난에 화를 입었으니, 시호는 節愍이요. 莊陵 別壇에서 향사한다. 瑾의 아들은 介甫인데 생원으로 군수를 지냈고, 딸은 敎授 曺致善에게 출가하였다. 琰의 아들 淵은 參判에 추증되었고, 귀산의 아들 士敦은 문과에 급제하여 正言을 지냈고, 士淳은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으며, 딸은 景居倫에게 출가하였다. 斐의 아들 順履는 생원이고, 思履도 생원이며, 明履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지냈으며, 恒履가 있다. 딸은 宋碩之, 朴思寅, 金石達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斯文의 아들 智山은 무과에 급제하여 僉中樞府事이며, 智崑은 현감, 智崙은 察訪, 智崗은 司果로 참판에 추중되었다. 崇文의 아들 哲山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함께 순절하여 敎官에 증직되어 역시 장릉 별단에 향사되었다. 介甫의 아들 孟謙·仲謙은 모두 參奉이며 仁謙은 동지중추요, 季謙은 司直이며, 딸은 奇信中, 徐思勉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淵의 아들 方은 효도로 정려가 내려졌으며,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이제 공의 세대가 거의 五백년이 넘는데, 그 사소한 행실은 비록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높은 절행과 大義는 거의 三仁에 가깝다 해도 부끄럽지 않고, 포은, 야은과 같다는 것은 이미 선배들이 論定했으니, 고기 한 점만 맛 보고도 한 솥의 맛을 다 알 수 있는데, 어찌 하필 많아야만 하겠는가? 銘을 청한 사람은 壽民, 昇鉉, 秉憲, 泳萬인데 모두 훌륭한 선비이다. 다음과 같이 銘한다. 고려 말의 절의를 麗季節義 많은 사람이 말했네. 盖多可述 中華의 정통을 높이고 尊中華統 주자의 학문 믿어도 信紫陽學 풍속에 이끌려 風氣所牽 이루기 어려웠네. 而難其得 공의 자태 뛰어나서 公姿超群 장상의 기상 방불하였는데 彷彿間域 누가 도와 주었던가 誰其資益 포은 야은과 덕이 같았네. 圃冶同德 사업을 발휘하여 發爲事業 왕실을 돕고 協贊王室 만절에 물러나서 晚節歛退 의리로 절개 지켰네. 義在罔僕 여기에 비석 세우니 有此貞石 지나는 사람 절하리라. 過者其式 月城 ⑪崔益鉉 지음 註:①정몽주(鄭夢周 一三三七~一三九二):고려말의 학자, 층신, 호는 포은(圃隱).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 一四○一(태종一년) 영의정에 추증(追贈). 이성계 일파가 혁명을 일으키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擊殺)되었다. ②길재(吉再 一三五三~一四一九):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호는 야은(冶隱), 一三七○년 개경에서 이색(李穡) 정몽주 권근(權近) 등에게 성리학을 배우고, 조선 건국 뒤 一四○○년 세자 방원(芳遠)에 의해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고향 선산(善山)으로 내려가 김숙자(金叔滋)와 같은 제자를 기르는데 몰두하였다. ③이인임(李仁任 ?~一三八八):고려 권신(權臣)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의 손자로, 홍건적의 一,二차 침입때 개경을 수복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一三七四년 공민왕이 살해되자 우왕(禑王)을 추대 친원정책을 견지하다.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등에 의해 一三八八년 성주에 안치되었다가 사형되었음. ④지윤(池奫 ?~一三七七):무당의 소생으로 일찌기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一三七三년(공민왕 二十一) 서북면 원수(西北面元帥)가 되었다. 그 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라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를 겸하면서, 이인임(李仁任), 임견미(林堅味) 등과 함께 정권을 농락하다가 서로 사이가 벌어져 그들을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아들(益謙)과 함께 사형당했다. ⑤설장수(偰長壽 一三四一~一三九九) 본관은 경주며, 호는 운재(芸齋), 본래 위그르(Uighur:回鶻) 사람으로 一三五九년 아버지를 따라 귀화했다. 一三八九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우왕 손위(遜位)의 표문(表文)을 가지고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전후 八차나 사신으로 왕래했고, 시(詩)와 글씨에도 능했다. ⑥성석린(成石璘 一三三八~一四二四):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도곡(獨谷), 一三八四년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있을 때 왜구(倭寇)를 승천부(昇天府)에서 원수(元帥) 양백연(楊伯淵)과 함께 격퇴하고 수성좌리공신(輸誠佐理功臣)이 되었으며 많은 벼슬을 역임하여 一四一五년에 영의정이 되었고, 시사(詩詞) 초서(草書)에 뛰어났다. ⑦백이전(伯夷傳):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에 전하며 은(殷)나라 고죽군(孤竹君)의 아들로,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치자 이를 간(諫)하였으나 무왕이 끝내 천하를 차지하자 그는 주의 곡식 먹기를 부끄러이 여겨 아우 숙제(叔齊)와 함께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지내다 죽었음. ⑧도연명(陶淵明):동진 (東晋)의 자연시인(自然詩人)으로 명(名)은 잠(潛), 자(字)는 연명(淵明)이며, 심양(潯陽) 사람이다. 주제주(州祭酒)를 비롯하여 팽택(彭澤)의 영(令)이 되었다가 팔십여일(八十餘日)만에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전원(田園)으로 돌아와 시(詩)를 쓰며 자연과 일치되는 생활을 즐겼음. ⑨저구(杵臼):춘추(春秋)시대 진(晋)나라 사람. 공손저구(公孫杵臼)를 가리킨다. 그가 섬기던 조삭(趙朔)이 도안가(屠岸賈)에게 죽자 조삭의 유복자를 살리기 위해 그의 친구 정영(程嬰)과 함께 모의하여 조삭을 살리는 대신 자신이 죽었다. 여기서는 충헌공의 충성심을 저구에게 비유한 것이다. ⑩화봉(華封)사람:화(華)라고 하는 땅의 봉인(封人)이 수(壽), 부(富), 다남자(多男子)이 세 가지를 가지고 요(堯)임금을 축하했다는 고사(故事)의 인물로 축하할 때에 인용하여 쓰기도 함. ⑪최익현(崔益鉉 一八三三~一九○六):문신, 학자의 병장으로 호는 면암(勉菴),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一八七六년 일본과 통상이 논의되자,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렸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등 국내에 대소사건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하여, 배일(排日)과 매국역신(賣國逆臣)의 토벌을 주장하다. 여러 차례 체포구금되었다. 一九○五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의병을 모집. 四백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순창에서 관군 일본군과 맞서다 패하여 쓰시마 섬으로 체포되어가 단식 순절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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